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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 ‘은자의 나라’에 전한 기적의 복음

작성일 : 2021-10-08 09:57 수정일 : 2021-10-08 10:36

 

[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여성 선교사들의 삶 ]


‘가장 기운 나며 가장 시험이 되는’ 사역을 헤쳐나간 사람들
1890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조선선교부 의료선교사 존 헤론(1856∼1890)이 창궐한 전염병을 치료하다 이질에 걸려 순직했다. 헤론은 호러스 앨런 선교사에 이은 제2대 제중원 원장이기도 했다.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지 5년여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다.


헤론의 아내이자 동역 선교사인 해리엇 깁슨(1860~1908)은 미지의 땅 조선에서 졸지에 ‘미망인’이 됐다. 1885년 6월 21일 하나님 명령에 따라 제물포항에 발을 내디뎠던 신혼부부는 그사이 딸 둘을 낳고, 병든 몸으로 가난한 조선 민중을 위해 의료와 교육에 치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다.

 

 

깁슨은 남편의 순직 후에도 조선 땅에 남았다. 미국 테네시주 의사였던 아버지 데이비드 깁슨과 여성 선교운동을 이끌던 어머니 사라 켈리 사이에 태어난 깁슨은 미국 초기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은 전형적인 크리스천 여성 리더였다. 특히 19세기 북미 지역에서는 ‘여성을 위한 여성사역’ 수행이 큰 호응을 받았는데 깁슨은 누구보다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

 


미국 북장로회는 이런 그녀가 해외 의료사역을 꿈꾸던 존 헤론과 결혼하자 1885년 1월 선교사로 임명했다. 테네시주 여선교회는 깁슨을 조선이라는 나라의 여성 선교사역자로 파송했다. 여성 선교사를 ‘남성 사역자의 보조’로 밖에 여기지 않던 시절, 깁슨은 적극적으로 조선말을 익히며 ‘조선의 금교(禁敎) 조치’에서도 조선의 유력자 부인들과 교제하며 선교사역에 힘썼다. 하지만 조선의 습한 기후와 두 아이를 낳으면서 생긴 유선염으로 인해 여학교마저 2개월 만에 중단하고, 간신히 모은 서너 명의 아이들을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운영하는 여학교로 보내야 했다.


“여자들은 매 주일 오후 두세 시간씩 복음서를 공부한다. 30여 명이 참석할 때도 있다. 아홉 명은 앞날이 기대되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들이 어서 빨리 이 어두운 땅에 빛이 되기를! 이것이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기운 나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 가장 시험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 1889년 4월 미국 북장로회 여선교회 선교잡지 「여성을 위한 여성의 사역과 우리의 선교현장」 중에서


깁슨은 ‘가장 기운 나며 가장 시험이 되는’ 사역을 그렇게 헤쳐 나가던 중 남편이 순직하는 고난을 맞았다. 조선 조정은 임금이 사는 사대문 안에 외국인의 시신을 두어선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헤론은 도성 밖 양화진에 묻힌 첫 사례가 되었다.


“갈급한 조선의 심령을 두고 떠날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남편도 저와 제 딸들을 지켜 주리라 믿습니다.” 깁슨은 권총을 머리맡에 두고, 밤마다 침실 문 옆에 조선인 일꾼을 세워 신변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변과 소요가 수시로 일어났고 반외세 기치가 위협적이었다. 깁슨은 1892년 4월 제임스 게일(1863∼1937) 선교사와 재혼하고서야 그 불안감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해리엇 깁슨의 조선에서의 호칭은 한국명으로 ‘혜론 부인’이었고 재혼 후에는 ‘기일 부인’이 되었다. 독립된 선교사의 위치였음에도 남성의 보조 사역자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조선에 온 여성 선교사들 또한 지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보조 사역자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우리나라가 파송한 수만 명의 해외 파송 선교사 부부 가운데 ‘아내 선교사’의 역할이 저평가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렇지만 깁슨의 경우만 보더라도 여성 교육과 전도, 그리고 게일 선교사를 도와 성경 및 『천로역정』 번역 등 개척선교사로서의 사명에 매진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어둠을 밝힌 여성 선교사들
 

 

조선에 온 여성 선교사들의 헌신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선교사들의 어머니’로 불리며 이화학당 등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튼(1832∼1909), 의료 선교사였던 남편 제임스 홀(1860∼1894)을 잃고 의료사역을 계속했던 로제타 홀(1865∼1951), 독신 여성으로 빈민과 병자의 어머니로 불렀던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한국명 서서평, 1880∼1934)이다. 해방 후에도 부모(노블 맥켄지)의 한국 사역 뜻을 이어 부산 일신병원 등에서 여성 진료에 앞장섰던 헬렌과 캐서린 자매, 한국의 정치 격변에 희생당한 에델 와그너(언더우드 1세의 며느리) 등 많은 이들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은사에 답했다.


1885년∼1950년 무렵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는 미국 장로회 950여 명, 미국 감리회 430여 명, 호주 장로회 130여 명 등이었다. 대략 잡아도 이 중 600여 명 정도는 여성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70%가 20대 부부였고, 90% 이상이 대졸이었다. 10명 중 7명은 미국 국적이었다. 본국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해 신앙 생활하던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고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젊은 외국인 선교사들은 목회와 의료, 교육에 종사하며 굶주리고 천대받는 한국 백성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었다. 특히 여성 선교사들은 가부장적 남편에게 맞거나 버림받은 여성들을 위로했으며 한글 교육을 펼쳤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여학교에 입학시켰다. 로제타 홀이 거두었던 박에스더(본명 김점동, 1877∼1910)는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 감리회 여선교사 미네르바 구타펠(1903∼1912년 한국 사역)은 동상에 걸려 문밖에 버려진 아이 옥분이를 거두어 살려냈는데 두 손과 한쪽 다리를 잘리고도 목숨을 건진 옥분이의 첫 마디는 이랬다. “저는 행복해요. 또 여기에 있는 동안 몇 달 동안 매를 한 번도 안 맞았어요. 이곳에 온 후로 배고픈 적도 없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여기 있어도 된대요.


” 열네 살 옥분이는 종의 신분이었고, 옥분이가 병들자 주인은 병원 앞에 버리듯 던지며 말했다. “가능하면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 간호사 구타펠은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고 소녀는 사랑에 응답하듯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선교사님. 내가 예수님께 기도하면 손발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죄를 씻어주신다고 사람들이 말했잖아요. 두 손이 없고 발도 하나만 있는 나 옥분이도 예수님이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기도했더니 그분이 정말 들어주셨어요. 내 죄를 다 가져가셨어요. 그리고 나를 사랑하세요. 나는 진심으로 그걸 알아요. 선교사님, 내가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예요.” 구타펠은 선교 보고를 통해 옥분이의 예수 영접을 전했다. 그는 귀국 후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선소녀 옥분이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140가정이 1명(65.9%) 또는 2명 이상(29%) 가족을 잃었다는 통계가 있다. 풍토병과 순직 등이 이유였다. 여성 선교사의 어려움은 부부의 사명보다 자녀를 지켜야 한다는 원초적 본능이었을지 모른다. 깁슨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를 결코 피할 수 없었다.


로제타 홀은 청일전쟁 와중에 남편을 평양에서 전염병으로 잃은 뒤 아들과 딸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생활하다 하나님의 음성에 이끌려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두 달여에 걸쳐 태평양을 건너 평양까지 들어갔다. 남편의 뜻을 잇기 위한 마음도 있었다. 한데 그 과정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딸 에디스를 평양에서 전염병으로 잃었다. 조선말을 조금씩 익히던 에디스였다. 강한 여성이었던 의료선교사 로제타는 딸을 양화진 남편 옆에 묻었다. 그리고 아들 셔우드 홀(1893∼1991)과 함께 평안도, 황해도, 서울, 경기도 등에서 의료 구제에 힘썼다. 크리스마스실을 보급한 이가 셔우드 홀이었다.

 


비운의 여성 선교사들
 

 

에델 와그너(1988∼1949)는 총탄에 숨진 비운의 선교사였다. 언더우드 2세(원한경)와 1916년 결혼한 뒤 고아 사역에 몰두하던 그는 자택(현재 연세대 신촌캠퍼스 언더우드家 기념관)에서 한국인 사회주의자 학생이 쏜 권총에 희생됐다. 에델은 미국 미시간주 킹스턴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선교부 추천으로 한국에 파송됐다. 미국 장로회가 한국외국인학교에 파송한 첫 선교사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강제 추방된 에델을 비롯한 대다수 선교사가 해방되자 다시 선교지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해방 직후 남북이 갈리며 혼란이 계속됐고, 선교사들 또한 사회주의자들에게 적으로 간주되어 사역이 쉽지 않았다.


“20여 명의 교수 부인들이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보니 한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무조건 방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겼고… 옥신각신했다. 소란한 틈을 타 또 한 명이 어느새 뒷문으로 들어와 어머니를 향해 뒤에서 총을 쏘았다. …어머니는 백낙준 총장 부인의 차로 세브란스로 옮기는 도중 운명하고 말았다.”

- 1982년 언더우드 3세 원일한 박사
신문연재 회고 중에서


당시 신문은 연세대 학생 사회주의자들이 에델와그너와 함께 있던 시인 모윤숙을 저격하기 위해 침입했다가 벌어진 우발사고였다고 보도했다.

 

 

지금 서울 구로구 천왕동에 가면 ‘에델마을’이란 사회복지 시설이 있다. ‘에델’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에델 와그너가 세운 고아원이 그 시작이었다. 에델은 신혼시절에 서울 서대문 자신의 집에서 한국의 고아를 거두어 고아원을 운영했다. 이 고아원이 서울 용산구 청암동에 ‘기독교여자절제소녀관’으로 운영되다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선교봉사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경기도 화성 제암리를 방문하다가 교통사고로 숨진 마거릿 불(1873∼1919)도 비운의 여성 선교사다. 마거릿은 남편 유진 벨(1868∼1925)이 운전하던 차에 폴 크레인, 녹스 선교사 등과 함께 탔는데 지금의 화성 병점역 근처 철로를 지나다 열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마거릿과 크레인이 숨졌으며 녹스는 한쪽 눈을 실명했고 유진 벨은 찰과상만 입었다. 유진 벨은 첫 부인 로티 위더스푼 선교사를 1901년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잃고 재혼한 마거릿마저 먼저 보내야 했다. 로티는 신학교 총장의 딸이었고, 마거릿은 군산에서 활동한 윌리엄 불(한국명 부위렴, 1876∼1941) 선교사의 누이였다.

한국에 파송된 여성 선교사들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의 모델 ‘가정’을 지키는 ‘가정부인’이라는 자리에 충실하면서 전도를 위한 작은 모임들을 구축해 나갔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 여성리더십으로 발전되었고 이제는 역으로 동남아 및 유럽 등 세계 각지에 수만 명의 여성 사역자를 파송하는 힘이 되었다. 희생 없는 전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이들이 보여준 셈이다.
 

 

 

 

 


전정희
국민일보
논설위원 겸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