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

교육/양육

HOME > 교육/양육

「202107」 주일학교는 언제 생겼는가?

작성일 : 2021-06-30 16:01 수정일 : 2021-06-30 16:21

1. 주일학교의 역사


주일학교의 창시자는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 1735~1811)입니다. 그는 영국 글로스터에서 1780년 세계 최초로 주일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산업혁명이 한창이었던 당시 영국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이름조차 붙이기 힘든 다양한 범죄가 범람했습니다. 아이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으며, 귀족들을 비롯한 극소수만 교육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내몰려서 쉴 새 없이 일해야 하는 산업현장은 너무나도 비위생적인 상황이어서 당시 영국인의 평균 수명이 40세가 못 되었다고 합니다. 인쇄업을 하던 레이크스는 범죄인들을 교화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들여 25년간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노력했지만 자포자기합니다. 결국 그는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가 주일학교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레이크스는 스톡크 목사와 함께 1780년 글라우 체스터의 수티 엘리(Sooty Alley)라는 곳에서 킹여사(Mrs. King)를 교사로 임명하여 주일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통학 거리가 너무 멀어서, 메레디스 여사(Mrs. Maredith)의 부엌을 빌어 자리를 옮겼으며 메레디스 여사를 교사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아이들의 질이 너무 나빠서 사표를 내고 그만두었습니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는 또다시 크리스츨리 부인(Mrs. Christchley)의 집으로 옮기는데, 비로소 이곳의 주일학교가 안정을 얻습니다. 오전 10∼12시, 오후 1∼5시에 열린 주일학교에서 가르친 내용은 글 읽기, 손 씻기, 얼굴 닦기, 머리 빗기 등을 비롯하여 성경을 가르쳤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는 성공적이어서 1783년 글로스터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켜서, 주일학교가 설립된지 불과 5년 후인 1785년 각 교회의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 수가 영국에서만 25만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일학교 운동은 영국의 교회와 사회로부터 부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영국교회와 귀족사회는 주일학교를 ‘위험스럽고, 비도덕적이며, 악당의 조직이고 더 나아가 악마의 기구’라고 정죄했습니다. 당시 영국교회의 주교는 모든 사제에게 통보하여 주일학교를 저지하도록 지시했고, 귀족과 부유층들은 주일학교야말로 자기들의 선량한 종들을 선동하여 임금상승을 부채질하는 나쁜 집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교회와 귀족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주일학교는 레이크스 사망 20주기인 1831년, 레이크스 동상을 제막하는 식전에서 영국의 주일학교 학생 수가 125만 명에 이른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레이크스는 “나에게 작은 저금통장이 있는데 이 돈으로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십시오”라고 유언했습니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 운동은 곧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851년 스웨덴에서는 7,000개의 주일학교와 32만 명의 학생, 2만4,000명의 교사를 보유하게 되었고, 1865년 네덜란드에서는 2,000개의 주일학교, 21만 명의 학생을, 1891년 독일에서는 9,000개의 주일학교와 95만 명의 학생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협회에서 교재 발간
레이크스는 1803년 <주일학교협회(Sunday School Society)>를 설립했는데, 이 협회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칠 교재를 통일적으로 만들 필요성을 느껴서 <통일공과>를 발간했습니다. 약 100년 후 20세기에 들어오면서는 학생들의 학습을 수준별로 향상하자는 취지에서 <계단공과>가 출간되었습니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 운동은 미국에 전해지면서 더욱 활발해집니다.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교회가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레이크스가 주일학교를 설립한 지 불과 10년 후인 1790년에 당시 미국 수도이자 중심지였던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주일학교협회가 설립되었고, 이것을 필두로 각 주에 주일학교협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후 1824년 <주일학교연맹>이 설립되었고 이 연맹이 미국 전체의 주일학교를 관장합니다.


1889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제1차 세계주일학교대회를 개최했고, 1907년 제5차 로마대회 때, 영국, 미국, 유럽 대표들은 <세계주일학교협의회(World’s Sunday School Association)>를 발족했습니다.

 

 


2. 한국의 주일학교

 


1888년 이화학당에서 출발
한국의 주일학교는 1888년 1월 15일 스크랜턴 부인이 주도하여 이화학당의 한 단칸방에서 어린이 12명, 부인 3명, 선교사 4명으로 시작했습니다. 1905년 선교연합공의회 안에 <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주일학교가 공식적으로 설립되는 계기를 맞습니다. 1907년 로마에서 열린 제5차 <세계주일학교대회> 보고에 의하면, 당시 한국의 주일학교 수는 전국에 613개였으며, 학생은 4만 5,918명이었고, 1913년 제7차 대회에서는 주일학교 수가 2,392개, 학생은 11만9,496명으로 보고되었습니다. 1913년 세계주일학교협의회 부회장인 하인즈가 내한했을 때, 그를 환영하는 주일학교 대회에는 1만4,000명이나 운집하기도 했습니다. 1921년 전국 주일학교대회가 열렸는데,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궁혁 박사가 초대 대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주일학교는 1911년부터 미국의 통일공과를 번역하여 주일학교 교재로 채택했으나, 1927년부터는 우리가 직접 계단공과를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 미국 유학파들의 귀국을 계기로 각 신학교에 기독교교육학과가 신학과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고, 주로 루이스 쉐릴의 <만남의 기독교교육>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우리에게 친숙했던 80년대의 <말씀과 삶> 시리즈나 2000년대부터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부르심과 응답> 시리즈에 배어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일학교를 교회학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1903년부터 1940년까지 주도적 역할을 했던 종교적 성서교육학회(종교교육협회, R. E. A.)에 영향받은 것입니다. 일반적인 공교육이 차츰 보편화하면서 이들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종교적 진보학파는 단순히 요일을 가리키는 주일학교, 즉 Sunday School 보다, 이러한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주체를 가리키는 교회가 포함된 교회학교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도 초창기부터 줄곧 사용하던 주일학교라는 용어 대신에 대부분의 교단이 교회학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청년문화를 가볍게 본 독일 교회의 모습
필자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1990년대 후반에 독일 원로 신학자들에게 질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현재 독일 교회에는 성도들이 없어 텅텅 비어있는데,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독일 교회의 상황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원래 독일 교회에는 성도들이 넘쳐났었습니다. 특히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거리마다 넘쳐나는 시체를 본 독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교회마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청바지, 통기타, 히피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청년문화가 등장했습니다. 이때 교회에서 젊은 사람들이 대거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자녀도 함께 이탈하면서 교회학교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문화가 처음 대두되었을 때는 워낙 불량스럽게 보여서 설마 이것이 교회를 위기에 처하게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70년대의 10여 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에 두 세대가 한꺼번에 이탈하면서 교회는 치명적으로 타격받았습니다. 지금은 이탈 세대의 부모 세대인 노인들만이 텅 빈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독일 교회 원로들은 이것을 설명하면서, 만일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전 교회적으로 철저하게 대응했을 것이라며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청년문화를 끌어안는 한국 교회를 소망하며
한국의 교회학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때 교회학교가 한국 교회 부흥의 견인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그 반대의 양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소규모 교회는 교회학교 부서가 아예 모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교회학교가 어려움을 겪게 된 원인으로는 저출산, 토요일 휴무, 놀이문화의 다양화 등 여러 가지가 지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을 미처 극복하기도 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기로 다가 온 코로나19 사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합니다. 이 사태는 아직 종식되지도 않아서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될지 가늠하기도 힘듭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이 여름, 다시 교회학교 여름 교육행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영락교회 교회학교의 여름 교육행사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락교회는 1960∼70년대 명실상부한 한국 교회의 대표적 교회였습니다. 영락교회의 신자든, 다른 교회의 신자든 모두 다 영락교회를 바라보았습니다. 영락교회의 지도자적인 모습은 수많은 교회에 모범이 되고, 용기를 주고,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필자인 저도 교회학교 교육행사 관련해서 영락교회에 수도 없이 왔었습니다.


어두우면 등불이 필요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어두웠던 과거, 영락교회가 등불을 비추었던 것처럼,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겨있는 이 때에 영락교회가 다시 한번 등불을 비추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레이크스가 주일학교를 창시한 역사를 뒤돌아본 것은 그가 어두운 시기에 등불을 비춘 훌륭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학교를 다시 살려야 하는 시대적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영락교회 교회학교를 통해 놀라운 역사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가 그 역사를 보고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우진 교수
서울장신대 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