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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 아직 끝나지 않은 6·25 한국전쟁

작성일 : 2021-06-02 09:22 수정일 : 2021-06-02 09:42

 

이 땅에 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을 맞게 되었다. 그 참혹했던 3년간의 한국전쟁(이하 6·25로 호칭)은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소련 스탈린의 승인과 중공의 지원으로 면밀하게 작전계획을 세운 김일성 집단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대한민국을 침략한 역사이고 현실이다.


1950년 6월 25일은 주일이었다. 영락교회는 3주 전인 6월 4일 본당 건물 입당예배를 드렸고 이날은 새 성전에서 세 번째 예배를 드리며 건축비 부족헌금 1,200만 환 특별봉헌도 있었다. 예배를 폐회할 때쯤 비로소 공산군이 남침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끔찍한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이 글이 우리 젊은 세대가 6·25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참고가 되기를 기대한다.

 


스탈린의 최종 승인 받은 김일성의 남한침략
한때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로 뜨거웠던 적이 있다. 한 언론사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교생 506명에게 누가 6 · 25를 일으켰는지 묻는 질문에 북침이라는 답이 69%(남침 31%)였고 우리의 주적은 어느 나라이냐는 질문에 대해 육사 입교생의 34%, 훈련소 입소 병사 74%가 미국이라고 답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386 세대에게 바이블과 같은 존재로 널리 읽혔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이나 미국 수정주의 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남침 유도설』이 원천이라 하겠다. 우리 사회 곳곳에 침투해있는 종북좌파세력과 일부 좌편향 교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 보급한 역사 교과서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교묘하게 북한을 편드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진리는 살아있다. 때가 되면 증거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캐스린 워더스비(Weathersby) 교수는 소련의 공산정권이 붕괴한 뒤 옐친(Boris. N. Yeltsin) 대통령 통치하의 러시아에서 6·25 전쟁 비밀문건을 샅샅이 검토, 6·25는 북한의 김일성이 러시아 스탈린에게 1949년 초부터 1950년 초순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남침 승인을 요청한 끝에 수락받고 일으킨 전쟁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혀냈다. 워더스비 교수가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에 오간 비밀문서와 회담 내용 등을 분석해 쓴 『다시 본 한국전쟁』은 기존의 북침설, 북침 유인설 등을 주장한 좌파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더해 1994년 6월2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6·25 전쟁 전후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관해 정리한 216건 총 564쪽의 『한국전쟁 문서 요약』이 들어있는 검은 서류 상자를 전달했다. 그 내용 가운데는 1950년 5월 29일 슈티코프 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소련이 제공한 무기와 장비가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다. 6월까지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게 됐다’라는 내용이 담겨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책임과 민족의 비극에 대한 진실 해명에 큰 힘이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옳게 그리고 바르게 받아들인다면 ‘6 · 25는 북침이요 UN군은 점령군’이라는 좌편향 교육은 하지 못할 것이다.

 


전쟁 직전 한국에서 미군 완전 철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미군은 1949년 6월 말 487명의 군사고문만 남기고 완전히 철수했다. 한국은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서 미국에 상호 방위조약 체결을 요청했으나 한국의 군사 전략적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 미국은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국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군사원조를 제공했으나 병력 10만 명에 6만5,000명분만 지원되어 북한의 남침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력을 거의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북한은 1948년 2월에 이미 인민군을 창설했다.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타진했으며 스탈린은 대규모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같은 해 10월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부가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에서 승리해, 이후 동북아지역의 국제 정세가 급변했다. 중국은 북한의 요청으로 중공군에 편입되었던 조선족계 2개 사단, 약 3만 명(원래 1942년에 결성된 조선의용군)을 북한으로 보냈다. 북한은 이 병력으로 인민군 사단들을 편성했다.


1950년 1월에 이르러 스탈린은 유보적이던 입장을 바꾸어 북한의 남침계획을 승인했다. 까닭은 1949년 8월 소련도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핵 독점 체제가 무너졌고, 거기에 더해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Acheson)이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이와 관련한 중요 정보가 담겨있는 미국 극비문서 NSC-4812호를 영국인 간첩을 통해 입수해,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의 간섭이 없으리라 예측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김일성을 자신만만하게 만든 요인이 당시 남로당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었다. 북한이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하면 자신들에게 호응할 3만 명의 남로당 당원들이 지하에서 대기상태라는 허상을 믿고 있었다.

 


주일 아침의 기습 - 무력하게 무너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도 분계선에서 기습공격을 강행한 북한군은 단 3일 만에 서울에 입성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전쟁 직전 한국군의 전력 상태는 북에 상대가 못되었다. 북한의 병력은 우리 국군보다 두 배나 많은 10개 보병사단 3개 독립연대 18만2,000명인데 비해 국군은 8개 보병사단 2개 독립연대로 9만4,000명이었으며 북한 전투 장비는 남한의 3배가 넘었다. 국군에는 한 대도 없는 공포의 전차 242대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주포 176문, 아군보다 6배나 많은 곡사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우리 공군은 연습기 22대뿐인데 북한 공군은 전투기를 포함해 21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북한이 이처럼 완벽하게 남침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 국군은 군 고위층에 침투한 적의 첩자로 인해 남침 대비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전쟁 발발 수개월 전부터 남침 징후가 전방으로부터 속속 보고되었으나 묵살 내지는 무시했다. 전쟁 발발 2주 전 대대급 이상 전· 후방부대 교대가 이뤄졌고 각급 주요 군부대 지휘관의 이른바 6 · 10 인사이동이 있었다. 전쟁 발발 바로 전날인 24일 0시를 기해 2주 전 내렸던 비상경계령 마저 해제되었다. 많은 장병이 농번기 지원 명목으로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특히 6월 24일 저녁에는 용산 육군 장교클럽 낙성 파티로 육군의 고위 지휘관과 본부 간부들이 밤늦게까지 댄스파티를 벌이고 뿔뿔이 흩어졌다. 적의 침공 사실이 보고되는 시간, 어떤 대책도 강구치 못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발령된 것은 급보가 들어온 지 3시간이 지난 오전 7시였고 대통령은 10시 30분경이 되어서야 보고를 받았다. 부실한 전력대비상태, 해이해진 군기로 인한 부실한 대비태세가 빚은 결과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한 달 후에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났다. UN을 통한 미국의 신속한 개입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에 힘입어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회복하고 북한 땅 청천강 전선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현재 휴전선 위치에서 71년째 정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교훈
3년여간의 전투, 시간이 위기였고, 순간순간이 기적이었다. 1950년 6월 27일 재소집된 UN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에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키로 결의하고 16개국이 육·해·공군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으며 그 밖에 많은 나라에서도 경제·의료·인도적 지원 등을 제공해 주었다.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3일까지 3년여에 걸친 전쟁은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남겼다. 6·25 인명 피해 통계에 따르면 국군전사자 13만8,997명, 부상 45만742명, 실종 2만 4,495명이었고, 경찰피해도 전사 8,218명, 실종 1,934명, 부상 6,760명의 피해를 보았으며, 이산가족 1,000만여 명을 기록했다. UN군 전사자는 4만670명, 부상자 10만4,280명, 실종 4,116명이 발생했다. 이중 미국의 사망자가 절대다수였다. 6·25전쟁 기간에 종군목사 140명이 참전했는데 그중 13명이 애석하게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도했고 사랑하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역사를 모르면 현재를 알 수 없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6·25전쟁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UN군을 파송 받아 새로운 역사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 북한이 일으킨 6·25남침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전 상태일 뿐이다. 핵무장을 통한 적화통일 야욕은 변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해야 할 것이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나님께 기도의 불씨를 모으길 원한다.

 

 

 

 

 


이재규 은퇴장로
서초교구
전 예비역기독군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