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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

작성일 : 2021-03-06 07:17 수정일 : 2021-03-06 07:57

 

3·1운동 100주년을 지나며 우리는 다양한 독립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 이야기는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을까?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에 알리고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기억하고 기록한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02년 전 3·1운동 당시 불편한 몸과 위험한 상황에서도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이방인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유일한 이방인 독립운동가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박사다.

 


애비슨의 추천, 한국 땅을 밟다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난 스코필드 박사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세 나이에 홀로 캐나다 이민을 떠난다. 캐나다에 도착해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했고 원하던 토론토 대학수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무리한 탓일까? 21세에 소아마비를 얻어 불편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소아마비도 그의 강인한 의지와 삶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학업을 마치고 토론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모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하던 중 존경하던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 박사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애비슨 박사는 한국 선교사로 먼저 방한해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중 스코필드 박사를 한국으로 초빙한 것이다.


갑신정변 이후 설립된 광혜원(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시킨 애비슨 박사를 평소에 존경하던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한국행을 결심했고, 세브란스에서 세균학을 강의하며 한국인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목원홍 선생에게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 그는 한국어로 강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친근하도록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식 이름도 지었다. 석은 돌처럼 굳은 자신의 의지를, 호는 호랑이처럼 강인함을, 필은 돕는다는 뜻으로 식민지 조선인을 돕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한국 학생들에게 국제 정세를 알려주고 젊은이들이 무엇을 하며 미래를 꿈꿔 나갈지 가르치기도 했다. 민족을 깨우는 스승 역할까지 한 것이다. 그는 영국에서 힘겹게 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많이 봐왔으며, 캐나다로 이주해서도 어렵게 학업을 마친 경험이 있었기에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회활동에 관심을 보였다. 특별히 국내에서 청년운동, 사회운동을 주도한 월남 이상재 선생을 존경했다.

 


3·1운동 기록한 34번째 민족대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로서 또 다양한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던 그에게 이갑성이 찾아왔다.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일하던 이갑성은 당시 서울 세브란스병원 약제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영남지방 대표이기도 했던 이갑성은 스코필드에게 서양의 여러 기사와 글들을 번역해서 알려 달라는 부탁을 했다. 조선의 상황을 외신과 국제사회에 알려주길 요청하고 독립선언서 사본을 미국 백악관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3월 1일 아침 이갑성은 다시 스코필드를 찾아 탑골공원에서 진행될 예정인 만세운동의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주길 요청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했지만, 흔쾌히 승낙하고 당일 오후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찾았다. 탑골공원 만세운동 장면을 찍으러 일본인 상점 2층에 올라 사진을 찍다 낯선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고 불편한 몸으로 사진을 잘 담기 위해 일본의 눈을 피해 여기저기 높은 곳에 올라가 만세운동 현장을 담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당시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은 대부분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을 내세워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돕지 않았으나 스코필드 박사는 불편한 몸에도 조선인들의 만세운동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일에 적극 동참해 주었다.


3·1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각 도시의 지도자 및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펼치자 전국 각지로 만세운동이 불꽃처럼 번져나갔다. 비폭력으로 시작한 만세운동이었지만 일부 지역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일본도 인명 피해를 보자 우리의 저항을 철저히 응징하고 보복하기 위해 집단 학살을 계획한다. 그렇게 슬픈 4월의 봄이 시작되었다.

 


화성 제암리, 학살의 현장을 세계에 알리다
1919년 4월 5일 새벽, 일본은 경기도 화성군 수촌리를 급습해 마을과 교회에 불을 질렀다. 수촌리 마을의 42호 가옥 중 38호가 불탔다. 4월 13일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는 일본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로 부임해왔다. 토벌보다 치안유지가 목적이었으나, 발안 장터 만세운동의 주도자 중 제암리 사람들이 체포되지 않은 것에 불안해하며 토벌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세가 강해 민족정신과 더불어 신문화에 대한 수용이 활발히 일어나 의식 수준이 높은 마을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 소식을 듣고 4월 18일 자전거를 기차에 싣고 수원역으로 향했다. 역에서 내린 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먼 길을 돌아 제암리를 찾았다. 그는 제암리에 막 들어섰을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논을 따라가다가 모서리를 돌자 잊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은 불타 있었고 몇 군데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제암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학살한 이야기는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 「제암리 대학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4월 15일 화요일 이른 오후, 일본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성인 남성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니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교회에 모인 23명가량의 남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하면서 명령에 따라 바닥에 앉았다. 잠시 후 군인들이 교회를 둘러싸고 종이 창문 너머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청년들은 명령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악마 같은 군인들은 불에 잘 타는 초가지붕과 목조 건물에 불을 질렀다. 몇 사람이 뛰쳐나와 도망쳤지만, 그들은 곧바로 총검에 찔리거나 총에 맞았다. 탈출 시도에 실패한 6명의 사체가 교회 밖에서 발견되었다. 교회에 불려간 남편을 찾아 군인들의 포위를 뚫고 교회에 가려 했던 두 명의 부인도 모두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19세의 젊은 부인은 총검에 찔려 죽었고 40대의 여성은 총에 맞았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그 후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이것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피의 대학살 사건의 간략한 기록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와 인근 수촌리, 고주리까지 찾아가 일제의 잔혹한 학살 현장을 사진에 담고 시신을 수습해 주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제암리 학살보고서」와 「수촌 만행보고서」 등을 작성해 세계에 일제의 잔인함을 알렸다.


제암리를 다녀오던 기차 안에서 그는 우연히 이완용을 만났다고 한다. 이완용은 의사이면서 기독교인이었던 스코필드 박사에게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소?”라고 물었는데 스코필드 박사는 “당신은 먼저 이천만 동포 앞에서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라며 호랑이 같은 목소리로 꾸짖었다고 한다.

 


조선 독립을 호소하다 추방되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으로 감옥에 잡혀 들어간 독립운동가를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1919년 당시 전국적으로 거사됐던 3 · 1운동의 기세가 아직 식지 않았기에 서대문형무소 면회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점을 활용해 서대문형무소 출입을 허락받았다. 일본이 교도소에서의 악행을 감추고 ‘서대문직업학교’ 등의 이름으로 형무소를 포장하고 좋은 시설인 것처럼 기사 낸 것에 분노하며 신문에 서대문형무소의 실상을 공개했다. 1919년 5월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실’을 찾아 세브란스 간호사인 노순경을 만나고 이화학당 학생인 유관순, 어윤희 등도 만났다. 그리고 직접 총독과 경무국장을 찾아 항의하며 당장 비인간적인 고문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9월에는 동경에서 열린 극동지역 선교사대회에 나가 3·1운동의 무자비한 진압, 악행 등을 폭로하고 비난하며 일본 수상과 관리들 앞에서도 조선의 자치와 독립을 호소했다. 12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김마리아를 비롯한 간부 80여 명이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스코필드 박사는 직접 대구경찰서를 찾아 고문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며 수감자들에게 몰래 고약을 넣어주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일본에 눈의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독립운동을 돕는 그의 행동으로 일본은 감시원을 붙였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압력을 넣어 그와 학교가 맺은 계약을 종결하고 한국을 떠나도록 압박했다. 결국 그는 살해의 위협을 겪으며 1920년 4월 재계약이 안 되었다는 통보와 함께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이 그를 얼마나 미워하고 불편해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캐나다로 돌아온 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조선에 대한 염려와 격려를 잊지 않았고 한국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언젠가 조선 동포들을 만나기 위해 수입의 절반을 저축하고 있습니다.


독립의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국을 찾아, 국립현충원에 잠들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수립 10주년’에 맞추어 스코필드 박사를 국빈으로 초청했다. 3·1운동의 공로자인 스코필드 박사 환영식이 이화여고 노천강당에서 진행되었다. 3·1운동 당시 도움을 요청했던 이갑성 선생의 개회사에 이은 많은 이들의 환영과 선물에 그는 “대단히 고맙습니다” 라는 유창한 한국말로 기쁘게 화답했다. 그리고 남은 생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한다.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보육 사업에도 힘썼다. 해마다 3·1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당시를 회고하며 한국이 독립을 기반으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길 희망했다. 당시 정부의 독재와 부패한 정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제암리를 다시 찾은 그는 희생자 유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선물을 나눠주며 그들을 격려했다. 유족의 슬픔만큼은 아니더라도 스코필드의 사랑의 크기는 컸다.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준 것이다.


1970년 4월 12일 스코필드 박사는 그토록 사랑했던 대한민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죽음을 앞둔 그가 남긴 유서에는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을 계속 보살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제2의 조국 한국에 묻히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1968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아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사례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약자들에게는 비둘기처럼, 강자들에게는 호랑이처럼’ 말이다. 3·1절을 맞아 따뜻한 봄날, 서울 돈의문 박물관 마을 스코필드기념관이나 화성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찾아 스코필드 박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면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김학천 대표
조선선교연구소
부산 충렬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