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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 한경직 목사의 눈물, 외다리 그 소녀

작성일 : 2020-12-31 15:36 수정일 : 2020-12-31 15:59

 

오랜 기간 내 영혼에 가장 강하게 박힌 TV 화면. 1982년 「8시에 만납시다」.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토크쇼의 효시쯤 되는 프로그램으로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탄 특집에 출연하신 한경직 목사님께 김동건 아나운서가 물었다.


“목사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목사님께서는 답하셨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인격입니다. 꽃은 그 자체 아름다움으로 그치지만 아름다운 인격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마지막 질문은 “목사님, 크리스마스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잠시 후 천천히 말씀하셨다. “제가 일제 강점기에 신의주 제2교회에서 시무하며 고아원을 운영했습니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고아 소녀를 맡아 기르면서 고아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의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토막을 딛고 다녔지요. 그러다 1945년, 기다리던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공산당의 핍박으로 상황이 더 위급해졌습니다. 제가 급히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아 몇 명이 남으로 넘어왔지만, 그 아이는 올 수가 없었지요. 전쟁도 겪었을 것이고 어려운 시간을 그 몸으로 어떻게 지냈을까 늘 그립습니다. 가장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목사님의 눈물은 내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새겨주었고 그 소녀가 누구였을까 늘 궁금했다.


“『보린의 사랑은 강물처럼』만 남았는데 괜찮으세요?” 한경직 기념도서관에서 나의 의향을 물었다.


“그럼요. 감사합니다.” 보린원은 내 마음에 가까운 곳이다. 오히려 설레면서 기다렸다. 며칠 후 택배로 받아든 책은 1990년에 간행된 것이었다. 30년 된 책은 책장을 넘기면 몇 페이지씩 툭툭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조심스럽게 읽었다.


책의 첫 부분부터 한경직 목사님이 가장 보고싶어 하는 그 소녀에 대한 나의 오랜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1938년 일제 강점기 신의주에서 영락보린원 태동이 된 복순이 이야기를 상세히 읽었다. 한경직 목사님과 신의주 제2교회는 병마와 가난으로 끔찍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부녀의 삶을 돌보았다. 깊은 병으로 아버지를 잃은 복순이를 돌보기 시작하며 고아들을 품는 보린의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보린(保隣)의 뜻을 다시 찾아본다. 이웃끼리 서로 돕고 돌보아 줌. 새롭다. 보린의 뜻. 그랬구나.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고 당연히 교인끼리 서로 사랑하며 돕는 일,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영락 보린원(保隣院)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구나.


보린원 시작부터 함께 합력한 성도들의 실행력은 큰 도전이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선도적 사랑을 무조건 믿고 따르며 헌신한 교인들의 흔적이 가득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국민소득은 얼마였을까? 나라 잃은 하층민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실천을 가장 긴급하게 여겼다.

 

“목사님, 저도 할 일이 없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기부해야지요. 보린원은 우리 신의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아원이고 이 아이들은 모두 우리 민족의 핏줄 아닙니까?”


1942년 일제에 의해 교회에서 쫓겨난 한 목사님은 보린원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집으로 믿고 달려간다. 보린원 아이들을 위해 농사를 지어 먹여 살리기로 작정하고 열심히 임하셨다.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해 김세정 보모, 정용순 보모, 유의성 집사, 임병수 집사, 김이섭 집사, 정우균 장로, 김상익 장로, 우성세 집사 등 많은 분의 희생과 수고가 소개되었다. 한경직 목사님의 40대 초반 모습 묘사는 백세 소천하실 때까지 한결같았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언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분.


“깡마른 체구이지만 키는 훤칠했고, 혈색은 좋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준수한 품위가 넘쳐 있었다. 언제나 가벼운 미소를 띠고 누구를 만나든 먼저 공손히 인사했다. 또 설교는 대단했다. 부드럽고 온유한 성품에서 어떻게 그렇게 박력 있고 거센 물결 같은 설교가 나올까 신기할 정도로 힘이 넘치는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게 하고 감격하게 했다.”


내가 경험한 한경직 목사님의 그 모습과 여전히 일치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변함없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내신 모습. 우리 집 안방에는 성경 캘린더와 함께 한경직 목사님의 조그만 사진을 두었다. 가까운 믿음의 선진으로 날마다 기쁨, 기도, 감사로 살아낼 것을 격려하신다. 1948년 18세 소년으로 고향 평안남도 순천을 떠나 단신 월남하신 아버지는 오직 ‘베다니교회’로 향했다. 선천 신성학교 학생이었기에 교회에서 매우 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했다. 어려운 시절 끊임없이 몰려드는 탈북인들을 품으신 한경직 목사님의 마음은 내 삶에도 진하게 닿아있다. 우리 가족은 탈북 2세대와 3세대로 사랑의 빚진 자임을 잊지 않는다.


많은 분의 헌신과 희생으로 영락보린원은 세워졌고 유지되었다. 그중 여인의 몸이지만 엄마의 심정으로 한국전쟁 한복판에서 고아들을 지켜내신 김원자 원모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지혜롭고 담대하셨다. 목사님과 교회가 피난을 떠난 후, 공산당이 점령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먹이기 위해 피를 말리는 지혜를 짜내었다. 9·28 서울 수복에 기뻐했으나 불과 석 달 후 다시 1·4후퇴를 겪으며 인천에서 제주까지 고아들을 지켜냈다. 하늘이 보내신 보린의 어머니. 그 분은 모든 순간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기도하며 결단으로 살아낸 하나님의 딸이셨다. 그분의 수고를 영원히 기억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이후 그분의 아픔을 어찌 다 표현할 것인가. 목숨이 천 개라도 보린원 자녀들을 위해 사용했을 그 진심. 그러나 후일 평온을 되찾았을 때 ‘교단이 다르니 사임을 종용’하는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한계도 적혀 있다.


고아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할 때 어렵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사람의 삶이니 일상에서 부딪히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었으리라. 갖가지 여러 상처와 서운함과 배신도 있었다. 하지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으로 지키신 하나님 사랑은 보린원을 통해 고아들을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키셨다. ‘누룽지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흘금거리던 모습은 구김살 없고 당당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30년 된 이 귀한 책은 잊어서는 안 될 귀한 자료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믿음의 이웃들도 많이 읽었으면 싶었다. 특히 한국의 가난, 한국전쟁에 처한 고아들을 돕기 위해 세워진 월드비전의 역사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멈출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순종의 역사,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귀한 책이다.


다만 ‘계집아이들’, ‘사내아이들’이라는 옛날 표현들, ‘팔이 아프도록 아이를 때리며 훈계한’ 무지한 문화의 차이들은 세밀하고 진실한 보정이 필요하다. 개정증보판이 나오길 소원한다.

 


바쁜 회사 일로 숨 쉴 수 없는 위기의 순간, 나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디자인을 전공하여 ‘사회적 결정을 위한 회의, 공유된 정보로서 디자인’ 업무는 탄력 있게 잘했지만 어릴 적 마음대로 그렸던 자유로운 그림이 그리웠다. 그렇게 시작한 즐거운 그림그리기는 영혼의 위로가 되었다. 그러면서 사춘기 아이들이 생각났다.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의 한 명만 있어도 온 집안이 조심조심한다. 그런데 사춘기 청소년이 여럿 있는 고아원은 어른과 아이들이 서로 얼마나 힘이 들까 생각이 들었다. 즉시 영락보린원에 전화를 했다. “김병삼 원장님, 중·고등학생들과 제가 그림 그릴 기회를 주세요. 그림이 아이들 성장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림그리기가 필요한 세 명을 보내주시면 제가 시간을 낼게요. 재료도 다 지원할게요. 직장 내 동호회 방을 사용할 수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잘 가르쳐 볼게요.” 김 원장께서는 세 명이 아닌 네 명과 함께 회사 로비로 오셨다. 그날 이후 네 명의 아이들과 매주 목요일 밤이면 함께 저녁 먹고 그림 그리는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갔다. <목밤쿵작작>.


“저도 돕겠어요.” 홍대 미대 후배인 이정은과 김인선도 참여했다. 목요일 밤마다 이 재료, 저 재료 써가며 즐겁게 하하 호호했던 시간들, KBS 시청자갤러리에서 전시도 함께했다. 그렇게 3년의 세월. 아이들이 대학 입시 체제로 들어가며 정리하는 2회 전시회는 성탄 무렵 우리 집에서 했고 그 흔적은 너무도 소중해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우리 집 벽은 <목밤쿵작작> 전시중이다.


당시에 비하면 지극히 풍요로운 현재의 대한민국. 내 손에 쥔 게 더 풍성해져도 이웃과 나눌 수 없다면 우리는 불쌍한 가난뱅이일 뿐이다. 한경직 목사님, 김치선 장로님, 김치복 장로님, 김상익 장로님… 교회 마당에서 뵙고 살던 어른들. 이제 예수님 집에서 보린원 이야기 나누시며 계실까요?


보린원에 얽힌 추억이 하나 더 있다. 대학부 2학년이었던 1978년 어느 토요일(정확한 날짜는 차범근 감독이 기억할 것이다) 친구들과 보린원에 간 날. 원장 김상익 장로님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하셨다. 내일이면 독일로 떠날 차범근 선수가 축구공 50개와 용달차 한가득 계란을 싣고 와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갔단다. 아이들이 꿈인가 생시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장로님도 한껏 기뻐하셨다. 국내에서 마지막 날 영락보린원 고아들과 축구를 하고 독일로 출국한 그 청년 차범근. 듣는 나도 기뻐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다. 그 후 좋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축복을 확인하는 마음이었다. 독일 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그의 인터뷰, 계획에 관한 질문에 “저는 신앙인입니다. 기도하면서 계획하겠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축구교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린원을 떠나 성인이 된 나의 <목밤쿵작작> 청년들은 이제 예술가, 직장인, 말 조련사가 되기 위한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친한 친척같이 아직도 서로 보고 싶어 하는, 사이다 같은 사이다. 만나면 함께 전시회를 보곤 한다. 미술로 서로 위로하고 응원하던 추억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생 선물이다. 이번 성탄에는 여전히 전시 중인 전시장, 우리 집에서 다시 모일 것이다.

 

 

 

 

 

 


김영미 권사
고양·파주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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