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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 복음으로 평양을 밝힌 마포삼열 선교사

작성일 : 2020-11-05 07:29 수정일 : 2020-11-05 07:47

 

1864년 1월 25일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시의 사업가 슈만 마펫과 마리아 제인 매키 부부의 넷째 아들로 사무엘 A. 마펫이 태어납니다. 완고한 청교도적 신앙과 윤리관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신앙교육을 받았던 사무엘 마펫은 하노버 대학교에 입학해 기본적인 소양과 기독교 훈련을 받고, 맥코믹 신학교에서 본격적인 목회자 교육을 이수합니다. 신학생 시절인 1886년, 그는 학생자원운동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운동은 유명한 복음전도사인 드와이트 무디가 헐몬산 학교에 개설한 일종의 수련회였는데, 이 수련회에 참석한 학생 중 상당수가 후에 해외 선교 현장에서 봉사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맥코믹 신학교 시절 선교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던 사무엘 마펫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 선교사가 되기 위한 길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신학교 동기생이었던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가 함께 기도하며 조선 선교의 비전을 구체화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1888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사무엘 마펫은 미국 미주리의 한 장로교회에서 1년간 목회를 한 후 1890년 1월 조선 땅에 들어옵니다. 마펫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 여장을 풀고 조선 선교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 선교사역을 위해 마펫 선교사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한글을 깨우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는 서상륜(1848~1926)이 함께했는데, 서상륜은 만주에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선교사를 도와 최초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인물이었습니다. 6개월을 한글 공부에 매진했던 마펫 선교사는 쉬지도 않고 같은 해 8월에 감리교회의 아펜젤러 목사, 그리고 헐버트와 함께 북쪽으로의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이 여정의 목표는 조선의 현장 상황을 살펴보고, 복음전도의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양에 도착한 그는 평양을 선교기지로 낙점하고 두 주간 평양지역을 면밀히 살피기까지 합니다. 서울-평양-의주-만주의 복음전도 루트를 염두에 두면서 이 여정을 준비했던 마펫은 의주 근처에서 신실한 청년 한석진(1868~1939)을 만났습니다(한석진은 후에 조선 장로교회 첫 한인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됩니다).


1891년 2월, 서상륜, 게일 선교사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난 마펫 선교사는 평양 근교에서 한석진을 다시 만나 평양에 선교 스테이션(기지)을 지을 구체적인 논의를 하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 세 사람은 북으로 더 이동해 중국 봉천에 들어가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서 만주 지역의 기독교와 중국선교에 대한 사항과 선교전략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눕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마펫 선교사는 평양 선교 스테이션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드디어 1893년 10월에 7인의 성도들과 함께 평양 널다리골에 예배당을 마련합니다. 이 예배당이 후에 장대현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1894년에는 공식적으로 평양선교 스테이션이 출범하게 되었고, 한석진은 평양 스테이션의 주요 동역자로 섬기게 됩니다.


하지만 마펫 선교사의 선교사역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특히 현지인들의 반발과 위협이 커서 마펫 선교사 본인도 거리 전도 때 돌을 턱에 맞아 큰 상처를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 평양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래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여전했고, 조선 정부도 기독교 선교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의 와중에도 조선인들에 대한 섬김과 위로를 멈추지 않은 마펫 선교사의 헌신적인 모습에 평양 주민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895년, 신학교 동기인 베어드 선교사가 평양에 오면서 마펫의 선교사역은 크게 탄력받게 됩니다. 1900년에 장대현교회 새 예배당을 봉헌하는데, 놀라운 것은 건축비 7천 원 중에 조선인들이 5천 원을 감당하고 2천 원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펫 선교사와 장대현교회 성도들이 처음부터 조선 교회의 ‘자립, 자치, 자전’을 강조하며 조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조선 교회의 설립을 소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펫은 조선 선교가 철저히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며 교회 중심의 선교를 위해서는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해 이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를 위해 1901년에 숭실학당을 만들어 1906년에 숭실대학으로 발전시켜 갑니다. 1901년에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위해 만들었던 신학반은 1903년에 정규과정으로 발전해 1학년 반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후에 평양신학교로 그리고 현재 장로회 신학대학교로 역사가 이어져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1907년, 대부흥의 역사 가운데서 9월 17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교회 1차 노회가 시작되며 한반도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노회에서 7명의 조선인이 목사 안수를 받아 최초의 조선인 목회자로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목사가 탄생합니다.


마펫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다 적자면, 이 지면에 넘쳐나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조선인을 사랑했고, 조선 민족의 교회와 신학을 만드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헌신한 선교사였습니다. 마포삼열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진 마펫 선교사의 열정과 헌신의 길을 수많은 한국 교회의 위인들이 밟고 지나갔습니다. 특히 한경직 목사님이 마펫 선교사와 한석진 목사의 선교의 열매로 탄생한 자작교회에서 신앙을 접하고 진광소학교와 숭실대학에서 과학과 신학을 배우신 역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펫 선교사의 선교 정책에서 한국 교회가 배워야 할 두 가지 원칙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마펫 선교사의 선교는 섬김, 위로, 치유의 선교였습니다. 청일전쟁의 위기의 시기에도 조선인들을 찾아다니며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했던 마펫 선교사의 모습은 외국인들과 기독교에 대한 평양 주민들의 적대적인 마음을 녹이고 평양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만들었습니다. 후에 대부흥 운동의 불길이 평양을 휩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선교는 철저하게 현지인들의 자립, 자치, 자전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선교사라는 지위를 우월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동등한 위치에서 조선인 지도자들을 세우고 그들이 스스로 교회를 세우도록 협조하고 안내해 주었습니다. 이런 마펫 선교사의 선교정책과 선교사로서의 삶은 한국 교회 선교에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송 훈 박사
서초교구
숭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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