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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 코로나19 뉴 노멀 시대의 교회 간 소통

작성일 : 2020-09-30 11:59 수정일 : 2020-09-30 12:55

 

 

[ 교회 회복과 치유의 매개 되어야 ]


코로나19 감염증이 세계적 대유행(pandemic)이 된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새로운 표준(new normal)’ 사회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감염증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로 대변되는 비접촉·비대면 방식으로의 급속한 전환을 겪고 있다. 이로 인해 사회 전반의 아노미(anomie)도 경험하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를 유지해온 기존 플랫폼 체계를 대체하는 온라인 디지털화가 대두되며 디지털 문해력(文解力·literacy) 습득을 위해 사회 모든 분야가 분주하다. 교육, 의료, 정치, 경제, 심지어 우리 기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온라인 예배, 원격 성경공부, 유비쿼터스 묵상 및 경건훈련 등의 방식을 고안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막연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변화를 회피하거나 부인하는 심리적 저항감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정서이다. 코로나 우울증(corona blue)이라고도 불리는 이 부정적 정서는 디지털 문맹(文盲·illiteracy)과 급속히 변화하는 플랫폼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만은 아니다. ‘격리’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느라 부득불 함께 있게 된 사람들(특히 가족)과 불통(不通)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나타나기도 한다. 기존에 구축했던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어느 쪽은 지나치게 멀어지고 어느 쪽은 지나치게 가까워진 데서 나타나는 일종의 인간관계 아노미 현상이다. 더 나아가 이전에 자유롭게 하던 행동과 습관처럼 굳어진 삶의 스타일에 큰 제약을 받고, 때로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되는 데서 오는 당혹스러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부정적 정서는 마치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된 이민자의 것과 같아서 상당한 심리적 위축과 당황스러움, 소외감과 절망감, 자신의 가치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과 잇닿아 있다. 이렇게 되면 심리적으로 팽창된 정서의 역학(dynamics)은 개인, 가족, 사회의 취약한 부분으로 집중되어 문제를 일으킨다. 개인적으로는 신체화 증후군(somatizing syndrome)을 경험하며, 가정에서는 폭력(언어, 신체)과 방임, 사회적으로는 상대적 약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날 개연성이 크다. 자신은 물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깊은 갈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뉴 노멀’ 시대를 더 지혜롭고 건강하게 수용하고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요구하는 답은 단지 방법론을 넘어서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은 시간과 공간, 개인과 상황, 처지와 기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대와 상황이 변하더라도 변치 않는 원칙은 없을까? 짧은 지면이기에 이제 그 원칙을 한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라는 인간 실존이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 아주 귀중한 피조물(창 1:27)이기에 사람으로 지녀야 할 고결한 품격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은 죄악으로 물든 인간의 죄성을 극대화할 것이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을 촉발하고, ‘나’와 ‘우리’라는 배타적 폐쇄성이 극대화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에 대한 따뜻한 배려보다는 몰염치한 냉혈한이 될 개연성이 크다. 인간에 대한 고귀한 책임감(noblesse oblige)을 갖기보다는 나와 우리의 이익을 위한 착취의 대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성이 상실되는 것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책, 『Ich und Du』에서 인간관계의 의미를 역설했다.1 만약 ‘나’라는 존재가 ‘너’와 만날 때, 특정한 관계(예를 들어, 거래) 안에서만 ‘너’와 관계를 형성하고, 다른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그 관계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이라는 지극히 기계적이며 이익이라는 목적에 집중한 관계라고 주장했다. 부버에게 있어 참된 삶은 본질적 존재로서 ‘나’와 ‘너’가 고귀한 품격으로 만날 때 가능하다.


영국의 극작가인 서머셋 모옴(Somerset Maugham)은 그의 짧은 글 ‘레드(Red)’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비극은 죽음이나 헤어짐이 아니다. 사랑의 비극은 무관심(indifference)이다.”2 모옴은 죽음과 헤어짐이 깊은 상처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추억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반면, 무관심은 기억의 영역에서 제외된 서러움 그 자체라고 보았다. 비정한 무관심과 기계적 이익, 몰염치한 이기심을 뛰어넘어 인간이 지녀야 할 고결한 품격, 즉 따뜻하고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라는 대원칙은 어쩌면 당황스럽고 혼란한 현시대에 필수 불가결한 자세는 아닐까. 이러한 품위를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도 않는다면 ‘코로나 뉴 노멀’ 시대를 더 현명하게 대처하고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기초한 소통을 개인과 교회 공동체 모두에 적용해야 한다. 이제 개인을 넘어선 교회 간 소통에 대해 제시한 원칙에 기초해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혼란한 현재가 ‘나’와 ‘우리’라는 배타적 아집을 촉발해서 이기심에 함몰되는, 즉 인간의 죄성이 고개 들지 못하도록 복음의 에이전트로서 기독 정체성 함양과 영성 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코로나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교회(ecclesia)이며 신앙공동체로서 개혁교회(ecclesia reformata)의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교회론(ecclesiology)의 정립과 그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교회론이 이론적 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치유를 위한 실천적 매개체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줄 아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엡 4:1~3). 한 분 하나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는 큰 교회이건 작은 교회이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지체임을 인식해 각 지체가 건실하게 설 수 있도록 상호 섬김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엡 4:4~12). ‘나’와 ‘우리’라는 폐쇄적 함정에 빠져 ‘내 교회 지상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이는(anaspora) 예배이건, 흩어지는(diaspora) 예배이건, 각각의 교회 형편에 따라 어렵게 결정한 예배의 형식에 대해 함부로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 헌금이 줄어들고 사역이 위축되더라도 오히려 어려운 형제 교회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단과 교파를 뛰어넘어 지역의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의 월세를 십시일반 부담하거나, 모든 교회에 적용 가능한 온라인 성경공부 콘텐츠를 개발해 나누는 것이다. 온라인 영상예배, 원격 성경공부, 혹은 SNS와 인쇄물 등 여러 매체를 활용한 영적 관리의 노하우를 나누는 것이다. 자칫 소외될 수 있는 농·어·산촌 교회들을 위해, 또 노인과 장애인, 영유아들을 위해 녹음과 녹화, 유인물 제작 등 영성 훈련을 도울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함(마 6:3~4)을 통해, 개교회의 색깔을 빼고 모든 교회를 위한 섬김을 실천해 공공성 혹은 공교회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마 6:19~20) 하나님께 부유해지기를 실천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눅12:21).


셋째, 공교회(Catholic Church)로서 교회는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세상을 섬겨야 한다. 교단과 교파정치에 매몰되어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것에서 벗어나,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 주님이 가까우심을 알아 복음의 관용과 배려를 세상 모든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빌4:5). 충심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를 전도와 선교의 자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도 부족한 위생용품이지만, 마스크와 손 세정제를 나누는 것이다. 상대적 취약 계층들을 따뜻함으로 돌보는 것이다. 마스크 안에서 굳은 얼굴로 있기보다는 마스크 너머로 미소 짓고 인사를 나누며 격려하고, 필요한 도시락과 생필품을 배달하거나 시원한 음료수를 격려의 글과 함께 건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복음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마5:16)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온 교회가 합심해 코로나19 감염증으로 힘들어하는 나라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야 한다. 과거의 역사와 상관없이 보낼 수 있다면 성금과 물품을 보내고, 한국 교회가 코로나19 상황에서 터득한 예배의 노하우나 원격(화상 및 그룹채팅 등) 성경공부의 기술을 나눠야 한다. 교회가 만든 다양한 동영상과 녹음된 자료들, 인쇄된 출판물들을 해외의 선교지와 목회 현장에도 보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나눔을 통해 교회다운 교회로서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 이렇게 고결한 품격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때, 교회 내, 혹은 교회 간, 더 나아가 교회 외적으로 소통을 이루어, 소통의 이유와 본질인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상억 교수
장신대 실천신학 목회상담학

 









 
1 Martin Buber, Ich und Du, 표재명 역. 『나와 너』 (서울: 문예출판사, 1977), 14.
2 W. Somerset Maugham, Collected Short Stories, Vol. 4. (New York: Penguin Classics, 1993),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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