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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 사탄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지 말고 버려야 할 것을 얼른 버립시다

작성일 : 2020-09-30 11:20 수정일 : 2020-09-30 11:45

 

오랜 신앙생활을 한 나에게 ‘소통’이 난제로 마음에 항상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소통 방법대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도 나 스스로에게 실망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가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인간의 오묘한 약점이 수많은 오해와 불신과 장벽이 되어 힘들게 합니다. 경험이 늘고, 나이 들어가도 소통은 늘 어렵습니다. 갖은 인연 사이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관계가 항상 많은 생채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체험을 비추어 성경에서 불통 요인과 방안을 찾아보았습니다. 소통의 최고 전문가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불통의 주요 원인
첫째, 사탄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거짓말이지요, 거짓 유혹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대등해진다는 거짓 거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과한 욕심에서 유래합니다. 어떤 이유든 구실삼아 내가 머리로 서야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거짓 의를 세우려고 그렇게들 서로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누구나 의인으로 인정하는 욥도 하나님께 한 소리 들었습니다.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둘째, 진작 버려야 할 것을 안 버리는 것에 원인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함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함은 남유다 왕의 땅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지역에 있는 단과 벧엘에 성전을 짓고 그 안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고 ‘이것이 하나님이다. 예루살렘에 올라 갈 필요 없이 단과 벧엘에서 제사 지내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통치기반인 백성이 떠나버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 제사 형태가 북이스라엘 멸망 때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가증한 것이었습니다. ‘이것만은 안돼!’는 불통의 암적 요인입니다.


셋째, 사탄은 성도끼리, 이웃끼리 잘 소통하며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 고백 중에 끊임없는 동족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말합니다. 사탄은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서 불신과 분쟁을 조장해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을 교회사가 증명합니다. 이스라엘 족속 중 유독 시기와 질투심이 많은 에브라임 지파가 있습니다. 택함을 받은 사사들이 힘들게 열심히 적과 싸울 때는 가만히 팔짱 끼고 있다가 승리하고 돌아오면 꼭 악의적 시비를 걸고 뒷다리 잡다가 4만 2천 명이 동족에게 죽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 왕으로 세워지기 전, 다윗의 사람인 요압 장군은 전쟁 중 자기 동생을 죽인 사울 왕 쪽 군사령관 아브넬을 사적 감정으로 죽였습니다. 아브넬 사령관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평화롭게 추대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의 성품이 의심을 받았고, 처신이 어려워졌습니다.


넷째, 무분별한 편향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교회 내 당을 짓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사사시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불량배들은 잠시 유숙하는 레위 지파 사람의 첩을 무리 지어 욕보였습니다. 입에 담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징벌을 위해 불량배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그들을 감쌌습니다. 이 때문에 동족끼리 싸웠고, 10만여 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는 600명만 겨우 살아남아 멸족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소통의 해결안
성경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만남이 얼마도 채 가지 않아 소통이 막혀 버렸습니다. 관계가 끝장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소통 방법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를 통한 방법이었습니다. 오랜 약속과 시련 과정 끝에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려한 개선장군의 모습이 아닌, 승리자인지 의심할 정도로 중죄인처럼 잡혀 묶이시고 형벌을 받으시고 온몸이 찢기어 조롱과 멸시 속에 당시 사회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방법만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평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일반적 해결방법과 달랐습니다. 최선의 소통 방법은 사랑으로 자신이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열 개 문장입니다. 그 짧은 기도 내용 중에 소통 관련 문장이 네 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고, 시험에 빠지고 사탄의 종이 되어 악행을 하고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갑니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습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왠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고, 자존심이 훼손되는 것 같고, 바보 취급당했다는 내 안의 다른 법의 속삭임에 속기 때문입니다. 이 속삭임은 끊임없이 마음의 문지방에 엎드려 기회만 있으면 들락거립니다. 창조주께서 친히 육신의 몸으로 인간과 화해를 위해 최악의 수모를 감수하셨는데 이것을 승리로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일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삶 속에서 얻은 지혜입니다.

 


복음송 다윗과 요나단의 ‘오늘 이 하루도’를 소개합니다.
 

“이 하루도 온유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겸손하게 하소서.
나의 걸음을 지치게 만드는 이들에게 용서를 베풀게 하소서.”

 

 

 

 

 

 

이성두 집사
마포·영등포교구
친교부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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