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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 6・25전쟁과 한국 교회

작성일 : 2020-06-02 15:28 수정일 : 2020-06-02 16:12

 

1950년 6월 25일(주일) ‘6·25’이라 일컫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와 대량 파괴가 발생했다. 무려 400만~50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死傷者), 또 수많은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이 속출했다. 전쟁통에 생이별한 이산가족은 전쟁 이후에 민족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과 함께 고착된 한반도의 분단은 국민 의식 속으로 내면화되었다.


6·25전쟁은 장로교회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전쟁 이전에는 북한지역의 교회가(특히 평안도와 황해도가) 장로교회를 주도했는데, 전쟁 기간에 수많은 교인이 월남해 남한에서 교회를 창립하고 재건했다. 장로교회는 전후(戰後) 사회재건에 크게 기여했다. 이 가운데서 학교 설립을 통한 인재양성과 산업전도를 통한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가 주목할 만하다.

 


1. 전쟁 중 한경직 목사의 사회봉사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경직 목사와 여러 교회 지도자들이 서울 예수교서회 사무실로 모였다. 이 자리에서 국난(國難)의 상황에 피난민을 돕기 위한 ‘대한기독교구제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바람에 이 단체는 첫걸음을 떼보지도 못한 채 해산되었다. 서울을 겨우 빠져나온 한경직은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 그는 7월 3일 여러 목회자와 대전제일교회에서 모였다. 여기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가 조직되었고 한경직이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곧바로 대전에서 시국강연회를 개최했고 또 구호사업과 대중 전도에 힘썼다. 그동안에 전세는 더욱더 북한군에게 밀렸다. 이에 이 단체는 대구로 옮겨갔고 대구 기독교청년연합회(YMCA)에서 사무를 보았다.


9월에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다. 이때 부산에서 서울로 온 한경직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후암동 보린원이었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지낸 아이들이 그를 반갑게 마중 나왔다. 이 아이들을 덥석 껴안은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1 계속 북진하는 유엔군이 10월 22일 평양을 점령했다. 이틀 뒤인 24일부터 여러 미국 선교사들이 이곳에 속속 도착했다. 한국인 목사들(윤하영, 이인식, 김양선, 유호준 등)도 도착했다. 한경직은 대한기독교구국회 일원으로 그곳에 갔다. 29일 주일 오후 2시 서문밖교회에서 대중 집회가 열렸다. 예배당 안에는 발 들여 놓을 공간이 없이 꽉 차 있었고, 예배당 밖에는 실내보다 훨씬 더 많은 교인이 껑충껑충 발돋움으로 창문을 통해 강단에 집중했다. 김영준 목사가 예배를 인도했고 한경직 목사가 이사야서 60장 1절로 설교를 했다. 이어서 온 회중이다 함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찬송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 중국이 개입했다. 11월 하순부터 평양 교인들이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대거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되었다. 이때 서울에서는 영락교회 교인 3분의 2가 부산으로 피난했다. 교인들은 한경직의 인도로 전쟁미망인(22명)과 고아(82명)를 돌보는 ‘다비다모자원’을 설립했다. 월요일마다 여전도회 회원들이 군 병원에서 침대를 정리하고 옷을 세탁했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상이군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도 운영했다. 그해(1951) 9월 광복동교회에서 총회를 소집한 ‘이북기독교 신도대표회’는 한경직을 다시 회장으로 선출했고, 이 신도대표회는 11월부터 전국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피난 생활을 하는 월남 피난민 교인들을 찾아 위로 방문했다.


미국 개신교 부흥사 밥 피어스(Bob Pierce) 목사가 1951년 부산에 방문했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목도한 그는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the man of broken heart)이 되어 이전에 함께 일해 본 한경직에게 “무언가 한국을 돕고 싶은데 오늘 이 상황에서 한국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라고 문의했다. 2 한경직은 이에 “교역자 중심의 특별 부흥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송도 부흥집회에 약 400명의 목회자가 참석했다. 그 이후, 1952년 12월 부산에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가 대중집회를 열었다. 첫 한국방문이었다. 이때에도 한경직이 통역을 비롯해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 이듬해 봄(5월 18일) 한경직은 빌리 그레이엄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약 40일 동안 각처에서 설교하고 전쟁 중인 한국의 실상을 소개했다.


전쟁 중에도 봉사(교육) 사역에 대한 한경직의 열정은 대단히 뜨거웠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학교 교육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 부모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소년을 모아 야간에 기독교 정신으로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자 했다. 김찬호가 이미 1951년 8월경부터 서울에서 성경구락부를 열어 운영해오고 있었다. 그는 그 이듬해(1952) 5월 백상용과 함께 한경직을 찾아가서 성경구락부 운영에 관해 의논했다. 한경직은 영락교회 구내에서 야간 성경구락부 중등부 과정을 시작하도록 했다. 이 성경구락부가 영락학원(영락중·고, 영락여상)으로 발전했다. 그해 3월 1일 북한 정주에 있었던 오산학교의 재건을 위한 모임에서 한경직은 모교인 이 학교의 재건을 위한 발기인이 되었고 이어서 상임위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시기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함으로써 폐교당한 평양 숭실대학을 재건하고자 서울에서 ‘숭실재건확대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에도 참석한 한경직은 숭실대학을 재건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이 대학이 1954년 영락교회에서 개교할 때 그가 학장으로 일했다. 부산으로 피난했던 보성여학교도 영락교회의 서울 복귀(1953년 9월)와 함께 교회 안으로 복귀했다. 그해 12월에 영락교회는 돈암동에 경로원(양로원)과 모자원을 설립했다.


영락교회 창립 14주년 기념예배(1959년 12월 첫 주일 저녁)에서 한경직은 ‘영락교회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상부상조’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3 영락교회 교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특히 6·25전쟁 중의 피난처에서, 한마음 한뜻을 가진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가 도와주고 의지했다고 회고했다(예, 직업과 직장 소개, 거주지 마련, 고아원, 모자원, 경로원 등). 영락교회는 북한 전역과 남한 각처에서 모인 피난민들이 모인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한 피난민 교회인데, 교인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상부상조의 정신을 실천했기에 사회 속에서 대단한 결실을 보았다고 자평했다(예, 사회복지기관 설립, 학교 설립 등).

 

 


2. 전후(戰後) 사회재건에 기여한 교회
1) 기독교학교 설립을 통한 인재 양성
앞에서 살펴본 대로, 월남 피난민 교인들의 가장 절실한 염원은 자녀교육이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자녀교육이 가족의 미래를 밝힌다고 확신했기에 교인들은 매일 끼니 걱정을 하면서도 자식 교육만은 반드시 시킨다는 의지를 갖췄다. 이렇게 굳은 의지 안에는 부모인 자신들이 다녔던 북한의 기독교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부모들은 기독교학교의 신앙교육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히 높았다.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학교 교육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 부모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모아서 야간에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자 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김찬호가 1951년 8월 서울에서 성경구락부(공민학교)를 열어 운영했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왕성했던 성경구락부 설립은 한국의 일반 교육사(敎育史)에서도 아주 중요한 교육운동이었다. 1952년 11월에 성경구락부의 재학생이 서울에 약 7,000명, 충주에 약약1,000명, 거제도에 약 2,000명, 인천에 약 1,500명이었다. 1953년 2월에는 전국에 300∼400개의 성경구락부가 있었고 또 전체 재학생이 약 30,000명이었다. 이 무렵, 서울에는 93개의 성경구락부가 운영되었고 남녀 재학생이 9,750명이었다. 성경구락부는 초등학교 수준의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성경과 생활신앙도 함께 가르쳤다.


1954년 6월에는 전국적으로 약 1,500개의 성경구락부가 있었고 재학생이 약 55,000명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전국의 재학생(장로교회 소속 성경구락부)이 약 70,000명이었다. 성경구락부에서 가르치는 교사는 대다수 신학교의 졸업생이거나 재학생이었다.

 


2) 산업전도
1950년대 후반에 한국 장로교 총회는 ‘산업전도’에 착수했다. 산업전도가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산업전도를 주도적으로 추진한 교회 지도자는 6·25전쟁 전후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교역자들이었다. 이와 관련된 산업전도 배경에는 월남 피난민의 역사가 있다. 월남 피난민들이 처음에는 38선 근처 남한에 머물렀다. 조만간에 고향(북한)으로 돌아갈 꿈과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월남 피난민의 약 60% 정도가 이 지역에 정착했다. 그 나머지 대다수 피난민은 서울, 인천, 부산, 그리고 대구 등지에서 삶의 둥지를 틀었다. 이것이 남한 대도시의 인구증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남한의 도시화 비율이 1949년에 17.3%, 1950년 18.4%, 1955년 24.5%로 계속 증가했다.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 산업전도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때는 1957년이었다. 4월 12일 총회의 전도부 안에 ‘예장산업전도위원회’가 조직됨으로써 산업전도 활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동남아시아교회협의회 산업전도부 총무이자 미국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였던 헨리 존스(Henry D. Jones)가 3월에 내한해 독려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이듬해 필리핀에서 개최할 제1회 ‘아시아 산업전도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아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교회들이 산업전도에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장로교 총회가 1958년 집계한 바에 따르면, 교단 총회의 산업전도를 받아들인 산업체들은 근로 노동자 수가 적게는 4백 명에서 많게는 5,000명에 이르는 공장들이었다. 예를 들어 동양방직, 경성방직 영등포 공장, 금성방직, 삼호방직, 조선방직, 조선견직, 전남방직 등은 노동자 수가 1,000명이 넘었으며 조선방직은 5,716명에 이르렀다. 이때의 산업전도는 근로자 전도를 통해 교세확장에 기여했다.

 


3)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한국 교회는 피난살이 자기 생존의 위협 속에서도 예수의 뒤를 따르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다(눅 10:25-37).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을 먹이고 잠재우고, 또 부상당한 병사의 수발을 들고, 배움의 기회를 잃은 청소년들에게 학교 교육을 제공했다. 당시에 설립된 공민학교와 성경구락부 대다수가 정규 학교로 발전했다. 전후(戰後)에도 교회가 사회복구와 재건을 위해 앞장섰다. 이 중에서 월남 피난민 교인들이 1950년대에 남한에서 섬유산업 등을 일으켜 남한 경제의 자립에 공헌했는데, 그 과정에서 교회는 산업전도를 통해 노동의 기독교적 정신과 가치를 일깨웠다.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또 전후(戰後)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던 당시 교인들은 오늘의 교회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무엇인지 일깨운다.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 이 글은 집필자의 책에서 상당 부분 가져왔습니다. 임희국, 『한국 장로교회 130년. 기다림과 서두름의 역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3), 216-241.

 

 

 

 

 

 

임희국 명예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사

 








 

 

1 한경직, 『한경직목사설교전집』 제4권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09), 171.
2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3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 밥 피어스의 전도 팀이 대구, 부산, 서울, 광주에서 전도집회를 열었다. 서울에서는 남대문교회에서 10일간 전도집회를 가졌는데 이때 한경직이 그의 설교를 통역했다. 전쟁 중이던 9월 22일 밥 피어스가 주도한 월드비전(World Vision, 구선명회)의 창립에 한경직은 한국인으로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3 『한경직목사설교전집』 제 4권,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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