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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 ‘세계인의 성자’ 손양원 목사

작성일 : 2020-06-02 14:30 수정일 : 2020-06-02 14:43

 

1995년 10월 9일로 기억된다. 가수 김수철과 영화배우 오정해 등 연예인이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8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천여 명의 나환자(한센씨병), 병원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펼쳐졌다. 소록도 ‘나환자 수용’이래 최대 행사였다.


이날 공연은 ‘작은 거인’으로 불렸던 김수철이 그곳 환자와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동료 연예인을 설득해 이뤄진 공연이었다. 지금이야 다리로 이어진 뭍이지만 그때만 해도 소록도는 고립된 섬이었다.


당시 30대 초반 문화부 기자인 내게 소록도는 ‘긴장’되는 곳이었다. ‘문둥병’이라는 두려움을 떨쳐 내기 쉽지 않았다. 그때 나는 신생아를 둔 아빠이기도 해서 아내에게 그곳에서 본 일들을 소상히 알리지도 못했다.


일그러지고 문드러진 한센씨병 환자 어르신들이 청한 악수에도 그들이 이것저것 먹을 음식을 챙겨줄 때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고 주저하며 먹지 못했다. 소록도 신성교회 하모니카합주단으로 구성된 환자들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리리라’ ‘기뻐하며 경배하세’ 등 찬송가 연주를 할 때 성령님께서 나를 힐책하는 것 같아 몹시 부끄러웠다.


공연 이튿날 아침. 김수철 씨를 해변 소나무 숲에서 만나게 됐다. 그는 소록도에 근무 중인 군의관 후배를 찾아 그곳을 찾게 되면서 공연을 기획하게 됐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곳의 노인 환자들을 제 몸처럼 아끼는 간호사들을 보면서 ‘지금 당장(right now)’ 움직이고 싶었다고 했다. 손양원 목사와 여수 애양원 얘기도 그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아침의 기억은 내게도 명징하다. 소록도병원 관사에서 병동까지 거리가 100m도 되지 않는데 20대 초반의 간호사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도시의 커리어우먼처럼 성장하고 출근하던 장면은 몽환적이기도 했다. 그들은 1분여의 출근을 위해 화장을 하는 청춘들이기도 했다.


그날의 소록도 공연 취재에서 받았던 감동 이후 본연의 업무와 무관하게 전남 고흥 소록도와 전남 여수 애양원을 가끔 찾곤 했다.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1902~1950)의 삶을 알고 나선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어림없는’ 마음도 들곤 했다.

 


우리 민족에겐 ‘애국지사’ 손양원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한센씨병 환우들을 위해 일하는 수고자들과 손양원 목사의 삶을 알리는 일을 문서선교라고 생각했다. 또 때로는 봉사로 때로는 기부로 ‘지금 당장’ 움직이곤 했다.


처음 전남 여수 애양원을 방문한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손양원 목사(1902~1950)의 헌신과 순교 기록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 논증이 부족했다고 할까. ‘열정적 개신교인의 마음을 담은 순교 신앙의 공간’이었을 뿐 일반인이 찾던 곳은 아니었다. 손양원 목사의 ‘위대한 사랑’이 신화화되어 가는 측면이 없잖아 있었다.


다행히 한국기독교가 2000년 대 들어 역사신학과 민족주의 역사학 관점에서 새롭게 한국 교회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손양원 목사의 삶 또한 ‘이야기’에서 ‘역사’로 자리해 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애양원만이 아니라 손 목사의 고향 경남 함안에서도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관’ 등을 건립해 활발한 자료 발굴과 민족의 인물로서의 손양원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이만열, 차종순과 같은 원로 학자의 연구에 힘입은 바도 크다. 이어 젊은 후학 이명재, 박준영 등과 같은 신진들이 칭찬 일변도의 헌정적 인물기에서 벗어나 ‘시대의 참 스승’을 찾아 나가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손양원 목사의 전기(biography)는 대서사이지만 서너 줄 요약으로도 그가 갖는 희생적 사랑의 메시지 전달이 가능하다. 그는 1902년 경남 함안의 전통적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3·1운동에 참여했고 일제의 궁성요배에 저항했다.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여수애양원에서 나환자를 돌봤고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됐다. 여순반란사건 때 좌익으로부터 두 아들을 잃고, 아들 죽인 원수를 양자 삼았다. 1950년 6·25전쟁 중 인민군 총에 순교했다.


‘순교’는 자기가 믿는 종교, 즉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까지 잃게 되는 일을 뜻한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이다. 그런데 이 사실(史實)은 우리 안의 언어다. 즉 성도에게 기탄없이 쓸 수 있는 영광된 면류관의 언어다. 천국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을 향해 설교자가 강단에서 “손 목사님께서 죽는 순간까지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해도 그레토릭(수사·修辭)은 설득의 효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양해된다.


하지만 일반인을 향한 메시지였을 때는 그가 지녔던 ‘진실’과 ‘정의’는 옅어지고 ‘설교자의 화려한 문체’만 남는다. 애양원 내 기념관과 교회, 고향의 기념관 등에 새겨진 화려한 문체는 그 문체를 구사한 사람을 드러내기 위한 언어로 밖에 볼 수 없다. 강단에서 손양원 목사 순교 예화도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한편 손양원은 서울 중동학교 등을 다니다 아버지의 동방요배 거부와 자신의 3·1 만세운동 참여로 그 학교를 퇴학 당하고 일본 스가모중학에 입학한다. 거기서 동양선교회 지도자 나카다 주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 나환자를 돌보는 계기가 됐다. 예수가 그러했으므로 손양원은 믿고 따랐다. 20대 초반 나환자촌 애양원에 부임한 목회자 손양원. 그때 문둥병으로 고향에서 버림받은 스물셋의 나환자 처녀가 훗날 손양원을 증언했다.

 

 


“살 썩는 냄새를 못 느끼게 하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광견병같이 무서워하는, 그렇게 무서워하는 세계에, 손양원 목사님은 한창 청년 스물 그때, 서이 너이, 다섯 살 때요. 그럴 때 무서워하지도 않고 누가 오라고 한 일도 없는데 당신이 찾아왔어요.”(한센씨병 환자 故김수남 생전 구술)


또 다른 환자의 증언.


“어떤 남자 환자 한 명이 다리에 상처가 나서 아무리 치료해도 안 나으니까 우리 목사님이 ‘어디 보자’ 그러더니 시상에 당신이 입으로 그 상처에도 당신 입을 대서 그 고름을 안 빨아냈소”(한센씨병 환자 김판임 2013년 구술)


또 김판임은 손양원의 주검을 직면하고 이렇게 기억했다.


“(나환자) 천이백 명이 전부 하얀 거로 조기 하나씩을 다했는데 얼마나 많았겠소. 나환자들이 목사님 유해 한번 싹돌고 저 신풍 둑길 거기까지 갔다가 들어와서 애양원 한 바퀴 돌아가지고는 와서 장례식을 했어요.”


“두 오빠가 순천에서 자취 생활을 하다가 여순사건으로 죽었는데 그 유품이 애양원으로 전달돼 왔어요. 그때 아버님이 큰오빠 교복을 붙들고, 작은오빠 교복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우는데 눈물이 뚝 떨어지면서 우시데요. 눈물이 뚝 떨어지면서….”(‘나의 아버지 손양원 회고록’ 저자 손동희 2013년 구술)


“첫째, 사람들이 병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얼굴이 무섭게 변해 있으니 대하기가 힘듭니다. 무섭지 않게 하시옵소서. 둘째, 환자들의 살이 썩으니 냄새가 심합니다. 냄새를 못 느끼게 하시옵소서. 셋째, 처음 나병 환자들을 위한 목회를 시작했으니 나병 환자들을 위한 목회로 끝내게 하여 주시옵소서….”(손양원의 기도 중)


이것이 실증적 1차 사료의 레토릭이다. 이러한 신앙의 진실이 성도에겐 순교자, 세상 사람들에겐 애국지사로 확장할 수 있는 연구의 기본이다. 손양원 목사의 일기, 관련 사진, 옥중서신, 설교문, 일경의 진술 조서, 증언 확보 등이 2천년대 들어서야 본격화됐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손양원의 명성에 비해 그간 연구가 미진했던 이유는 그의 예수 정신과 역사의식을 교계가 ‘순교자’ ‘신앙인’이라는 틀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에게는 ‘애국지사’요, 세계인들에겐 ‘성자’로 불려야 한다.

 

 

 

 

 

 

전정희
국민일보 부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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