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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3・1독립운동 101주년에 다시 보는 기독 여성독립운동가

작성일 : 2020-03-05 15:20 수정일 : 2020-03-19 13:25

 

 

지난해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여러면모가 새롭게 재조명되었습니다. 특히 역사(history)에 뚜렷한 기록을 남기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의 역사(herstory)가 주목받았지요. 2019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서훈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357명입니다. 기록에 남아있으나 서훈을 받지 못한 여성이 2000여 명, 이름조차 남지 않은 여성은 또 얼마나 숱한지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20세기 초를 전후해 전국 곳곳에 설립된 기독교 여학교 출신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특징입니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세상과 역사에 대한 눈을 뜬 선각 여성들입니다. 3·1독립운동 101주년을 맞는 올해,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생각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여학교
1886년 5월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서울 중구 정동 자택에서 여자아이 한 명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을 시초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전국 곳곳에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개교 33년 후 이화학당 학생인 류관순은 고향인 충청도 병천에서 아우내 만세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그는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찌 군기(軍器)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라고 당당히 맞섭니다.


류관순의 독립운동과 역사 인식은 결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과 예수님의사랑을 기반으로 참된 신앙과 진취성, 주체성을 배운 여성들은 일제의 조선 병탄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예리하게 비판했으며, 성서에 담긴 유대 백성의 고난과 이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바로 조선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사를 깊이 연구한 심옥주 한국독립운동연구소장은 “해외 문물의 유입과 선교사의 활동이 자유로운 지역일수록 교육기관이 활발”했다며 기독교 여학교를 기반으로 한 여학생 비밀결사대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지적합니다. 개성 호수돈 여학교, 평양 숭의여학교, 서울이화학당, 부산 일신여학교, 대구 신명여학교, 전주 기전여학교, 광주 수피아학교, 공주 영명학교 등 여성독립운동가를 키워낸 기독 여학교는 수없이 많습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
3·1 독립선언문 선포 한 달 뒤, 4월 8일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동포이시여”라고 시작하는 이 선언서는 ‘대한민족 부인동포의 대 정신 대 자각을 성명하는 선언’임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선언서는 일본 침략을 비판할 뿐 아니라 여성 활동의 중요성과 함께 국난에 처한 여성의 할 일을 강조했습니다. 최남선이 기초했던 3·1 독립선언문과 가장 다른 점은 한문 투의 어려운 문장 하나 없이 순 한글로만 썼다는 점, 그리고 여성의 역할을 분명하게 선언했다는 점입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여성들의 깨어있는 역사 인식과 저항정신, 위기 극복의 지혜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101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남자현, 권기옥, 조화벽, 김마리아, 안경신…
영화 ‘암살’에서 일제식민지배자들을 처단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델이 남자현입니다. 1872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 운동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동만주 12곳에 교회를 세워 전도와 여성 교육에 힘썼습니다. 1924년 사이토 총독 암살에 실패한 뒤 다시 만주로 돌아가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그는 1933년 만주국 일본대사 무토 암살계획에 참여한 후 체포되어 갖은 고난을 겪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고 그의 고향 영양에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마펫 목사가 세운 평양 숭의여학교는 일본어 수업 거부, 성경 과목 폐지 거부 등 뚜렷한 항일 정신을 새긴 학교입니다. 이 학교 송죽결사대에서 활약한 권기옥은 3·1 독립 운동 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도운 혐의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중국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1932년 상해사변 때 일본군을 기총소사로 물리친 공으로 중국 정부의 무공훈장도 받았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한국 비행대 편성과 한국광복군 건군 미 작전계획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습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 출신 조화벽은 함경도 원산성경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근대교육을 받았습니다. 호수돈여학교 기도실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한 그는 다른 학생들과 기도회를 마치고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휴교령이 내리자 조화벽은 버선목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인 강원도 양양에 돌아가 그곳에서 만세 시위를 계속했고, 후에 고향에 정명학원을 설립하고 상해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류관순과의 인연으로 1925년 류관순의 오빠 류우석과 결혼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가 설립된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서 태어난 김마리아는 대표적인 기독여학교 중 하나인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일본, 미국 유학을 거쳐 정신여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3·1독립운동 직전 있었던 도쿄 2·8독립선언을 현장에서 겪었던 그는 일본 여성으로 변장하여 기모노 띠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귀국합니다. 3·1운동으로 5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후 출옥한 그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식민지 조선의 여성 계몽과 독립운동에 힘썼습니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3·1운동 당시 평양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듬해,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그는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집니다. 7년 만에 출옥한 이후 안경신의 삶은 별달리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조국을 위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잊혀진 삶에 안경신의 이름을 더합니다.

 


글 박선이 선임편집위원